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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야기

설탕과 얽힌 서양사

by 유에베 2022. 3. 23.

설탕과 얽힌 서양사

진화생물학자들에 따르면, 고양이를 제외한 모든 동물은 단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쉽게 얻기 힘들지만 훌륭한 에너지원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역시 다양한 단맛을 즐기지만 단맛의 주원료인 설탕은 특히 인간에게 중요한 식료품이며 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예무역과 다양한 갈등이 존재했습니다. 설탕과 얽힌 서양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사탕수수 농장과 설탕 무역

설탕의 역사는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며, 17세기 유럽에서 설탕은 매우 귀하고 비싼 상품이었습니다. 콜럼버스는 1493년 자신의 두 번째 항해 때 설탕을 아메리카 대륙에 가지고 갔으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인들은 16세기에 자신들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었고, 네덜란드도 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으로 전해져 오는 설탕의 양은 보잘것없었고, 설탕 가격은 여전히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02년 설립 이후 개발한 향신료 거래의 급증은 상품으로 돈을 벌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카리브해 지역 일부를 식민지화하면서 이 지역을 개발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자 했습니다. 

땅은 얻어냈어도,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정제해서 설탕으로 만드는 과정은 복잡한 일이었습니다. 1627년 처음 개척한 영국 식민지 바베이도스는 처음 사탕수수를 재배한 곳 중 하나였는데, 이곳 농장주들은 브리튼 제도에서 계약 노동자들을 끌어들여 조금의 수확을 낼 수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수입해서 브라질 식민지의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노예들은 힘겨웠던 농장을 수익성 좋은 사업으로 변모시켰고, 바베이도스 외의 다른 섬들에서도 사탕수수 농장이 계속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세인트 키츠(Saint Kitts) 섬과 앤티과(Antigua) 섬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고, 프랑스인들은 세인트루시아(Saint Lucia) 섬과 마르티니크(Martinique) 섬, 과들루프(Guadeloupe) 섬에서 재배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서아프리카와 교역망을 갖추어 유럽에서 만든 물건들로 금과 상아를 사오곤 했습니다. 이제 이 교역이 확대되어 노예를 사고팔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물건들이 서아프리카로 들어가 노예를 사고, 이 노예들은 카리브해 지역에 배로 이동되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사탕수수의 최종 산물인 정제된 설탕이 유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역으로 인해 커다란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규모의 선행 투자가 필요했으므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일부 기관은 지금 누구나 아는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이때 특히 영국 왕족들이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홍차에, 프랑스에서는 커피에 설탕을 넣어 달게 마시고 때로는 설탕이 들어간 케이크와 함께 먹는 것이 유행하게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서 설탕 수요가 급증했고, 18세기가 지나는 동안 무역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의 대서양에 면한 항구 도시(브리스틀, 리버풀, 보르도, 낭트 등)들은 설탕 무역에 관여했기 때문에 부유해졌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은 카리브해 전역과 중앙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 본토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1750년 무렵에는 설탕이 국제 무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럽으로 수입되는 모든 상품 중 1/5을 차지했으며, 거의 대부분은 카리브해 지역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설탕 무역으로 창출된 부는 영국에 재정을 제공해 공업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고, 공업발전은 영국을 19세기 동안 세계에서 가장 번영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와 함께 런던은 세계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지위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탕수수 농장과 노예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은 잔인한 처우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탕 제조에 사용되는 방법의 야만성과 비인간성을 인정했으나 설탕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설탕값이 내려가자 수요가 더욱 치솟게 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고, 노예제의 끔찍한 본질을 담은 체험기들이 출판되면서 더욱더 지지를 얻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1807년에 노예무역이 금지되었고, 1834년에는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이전에 몇 차례 노예제 폐지와 복구를 반복했던 프랑스도 영국을 따라 1848년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이 무렵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 사탕수수 농장이 만들어졌고, 유럽에서는 사탕무가 광범위하게 재배돼 사탕수수 농장과 경쟁에 나서게 됩니다.

 

럼주와 혁명

17세기 말, 또 다른 형태의 설탕과 노예 삼각무역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보스턴 지역과 로스아일랜드주의 뉴포트(Newport) 같은 뉴잉글랜드 지역 항구 도시의 북아메리카 식민자들은 직접 럼주를 만들기 위해 서인도제도에서 설탕 정제의 부산물인 당밀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노예 무역업자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럼주를 통화로 삼아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산 뒤, 이들을 배에 태우고 대서양을 건너 사탕수수 농장으로 돌아왔습니다.

1690년 이후 뉴잉글랜드의 럼주 제조업자들은 카리브해의 영국인 소유 설탕 정제업체가 아니라 프랑스 업자들로부터 당밀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가 본국 브랜디 제조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식민지에서의 럼주 제조를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현지 시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프랑스 정제업자들은 영국인들에 비해 당밀을 반값 이하로 팔 용의가 있었고, 이에 따라 뉴잉글랜드 업자들은 럼주를 더 싼값에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아낀 돈으로 서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노예를 사 오기도 했습니다.

1733년 영국은 이 무역을 중단시키기 위해 서인도제도의 프랑스 식민지에서 뉴잉글랜드로 수입되는 당밀에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관세를 갤런당 6 페니로 정했는데, 이는 사실상 수입하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관세를 냈다면 럼주 제조업자들은 파산했을 것이고, 관세는 당밀을 영국 업자들로부터 사도록 강제하기 위해 설계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밀은 이미 카리브해 지역의 럼주 제조업자들에게 대부분 팔리고 있었으므로, 사실 공급 부족 상태였습니다. 많은 뉴잉글랜드 럼주 제조업자들이 불공정 관세라고 생각했던 이 조치에 굴복하는 대신 프랑스 식민지에서 당밀을 밀수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려는 영국의 고압적인 시도에 저항해 기세를 올렸습니다. 이 관세가 부과된 이후 수십 년 동안에 보스턴의 럼주 생산은 실제로 증가했고, 영국은 세금을 징수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이티와 쿠바 그리고 혁명

1804년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Saint-Domingue)에서의 혁명 성공으로 아이티 공화국이 건국된 뒤 프랑스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쿠바와 루이지애나로 옮겨갔고, 거기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는 데 역시 노예를 사용했습니다. 혁명 이전에 아이티는 카리브해 지역에서 가장 큰 설탕 생산지 가운데 하나였고, 또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설탕 산업이 붕괴한 뒤 경제는 파탄이 났고, 상황은 1825년 프랑스가 큰 빚을 떠안기면서 상황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혁명으로 발생한 손실을 보상하라고 요구하면서, 아이티가 지불을 거절하면 군사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설탕 사업의 상실로 이미 고통받고 있던 아이티 경제는 더욱 황폐해져서 결국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이티가 고통받고 있었던 반면, 쿠바의 설탕 산업은 확대되어가는 미국 시장에 설탕을 공급하면서 호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기간 동안 영국은 카리브해 지역에 있는 자기네 식민지의 대미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이에 따라 쿠바가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아이티에서 농장주들이 쏟아져 들어온 이후 생산량이 증가했고, 미국과 영국 사이의 1812년 전쟁으로 카리브해의 무역이 더 방해를 받게 되면서 그 덕을 보았습니다. 쿠바는 에스파냐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의 노예제 폐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사탕수수 농장은 1886년 노예제가 종말을 맞을 때까지 계속 노예를 부려 운영했습니다.

19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미국 투자자들은 쿠바의 설탕 사업체의 상당 부분을 사들였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자기네 지분을 합쳐 아메리카 설탕 정제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이 회사는 뉴욕 브루클린에 공장을 운영했고, 20세기 초에는 쿠바의 거의 모든 설탕 작물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설탕 사업을 시작으로 미국 기업가들은 오랫동안 쿠바에 관여했습니다. 20세기 들어 미국의 관심은 설탕에서 벗어나 다변화했고,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1959년 사탕수수 농장주의 아들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이끈 쿠바 혁명의 성공으로 갑작스럽게 끝나기 전까지 그 경제를 지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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